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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로 유배간 충선왕
고려는 몽골에 항전하였지만 결국 강화를 결정하고 개경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원종은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기를 자청했으니 고려의 왕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기로 하였고 그가 충렬왕이고 충렬왕의 부인은 세조 쿠빌라이의 친딸인 원성공주였습니다. 다음을 이은 충선왕은 몽골인 어머니를 둔 최초의 고려왕이 된 것입니다. 세자였던 충선왕은 1297년 자신의 어머니가 3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 탓을 아버지인 충렬왕에게 돌렸습니다. 충렬왕이 사냥에 집중하고 외도하는 바람에 마음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충렬왕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었는데 절에 행차할 때마다 원성공주를 모시고 가야하는 형편이었고 1277년에는 자신의 수행원이 적다며 공주가 화를 내고 돌아 가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아..
2022.12.20 -
서긍이 전하는 고려의 모습 고려도경
송나라의 사신 서긍은 1123년 고려를 다녀오면서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이 책은 일종의 견문록이자 보고서로 12세기 고려의 모습을 생생히 전하고 있는 책으로 『고려도경』이라고도 불리는 책입니다. 서긍을 이 책을 송황제 휘종에게 받치면서 한 부도 자신의 집에 소장하였는데 두 부 모두 없어졌다가 1137년 장시성 난창현에서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책은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있던 상태였지만 지금에 이르러 고려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도경』에서 전하는 고려의 궁궐은 당시 고려가 스스로를 황제국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서긍이 다섯 개의 문(광화문, 승평문, 신봉문, 창합문, 회경전문)을 지나야 궁궐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인데 조선은 황제국..
2022.12.19 -
고려말 요동정벌은 어디까지 이루여졌나.
고려말의 국내외 정세는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하는 격변의 시기였고 고려 국내적으로 사대부와 신흥무인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고려말의 중흥의 마지막 의지를 불태운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민왕의 많은 업적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 중에 바로 요동정벌이었습니다.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를 대외적으로 알려왔고 그러면서 시기에 따라 북진도 추진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왕조 창건을 부른 위화도 회군도 이러한 요동정벌의 연장선상에 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국내 교과서에서는 “공민왕은 고려의 자주성을 강화하기 위해 몽골식 풍습을 폐지하고 관제를 복구하였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
2022.12.18 -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13세기 중반 고려왕조에서는 한반도 역대 국가에서 드물게 해외원정을 단행하였습니다. 그것은 일본원정, 하지만 그것은 몽골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고려정부와 몽골은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1266년 몽골은 일본과 교류를 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습니다. "상천권명(上天眷命) 대몽골국 황제 편지를 일본 국왕에게 드린다. 일본은 고려와 가깝고 중국과도 통했다. 앞으로는 안부를 서로 전하고 교류를 맺어 서로 친목하자 또 성인(聖人:쿠빌라이)은 사해로서 집안을 이룬다. 서로 통호(通好)하지 않으면 어찌 일가를 다스리겠는가? 병사를 사용하게 되는 것을 대저 누가 좋아하겠는가? 왕은 이것저것을 살펴라. 불선백(不宣白)" 당시 가마쿠라 막부는 쿠빌라이의 편지를 오만불손한 것으로 여겼으나 편지의 내..
2022.12.17 -
고려 수도 개경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고려의 수도는 개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궁예의 폭정을 전복시키고 왕위에 오른 왕건이었기에 고려의 초창기 수도는 철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인 919년에 송악, 후일의 개경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었겠지만 왕건의 고려 창건은 궁예를 몰아낸 역성혁명이라는 측면도 배제할 수 없었고 이에 따르지 않는 무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움직임이 부담이 되어 자기 가문의 근거지가 되는 개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도읍을 개경으로 옮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왕조가 시작되는 입장에서 본래의 도읍을 버리고 새로운 도읍을 정하는 것도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바꾸어 생각하면 궁예가 애초에 후고구려를 건국했을 때에는 도읍지가 바로 개경이..
2022.12.16 -
고려말에 침입한 왜구는 누구인가.
고려말 왜구들의 침략은 왕조를 위태롭게 할만큼 거셌습니다. 아마 후세의 역사가들 중 일부는 고려가 망하게 된 이유로 왜구들의 노략질을 들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고려말 우리 백성들을 괴롭혔던 왜구들의 침략은 비단 고려에게만 해당되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신라 문무왕은 자신이 죽은 뒤 유해를 바다 가운데 묻어달라고 당부하며 자신이 호국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아내겠다는 유언을 남깁니다. 이러한 왜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오직 우리나라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는 대마도를 근거지로 둔 해적으로 동아시아 바다 일대를 제 집 드나들 듯이 하며 공포의 해역으로 만든 집단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러한 왜구에 대해 북한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동남아시아 여러 해안들에 싸다니면서 노략질을 일삼던 일..
2022.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