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552)
-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왜 사이가 좋지 못했나.
우리가 흥선대원군하면 떠오르는 단어 중의 하나가 바로 쇄국정책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그가 세운 척화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쇄국정책이란 말은 일본에서 들어온 말로 갑오개혁 이후에나 사용된 말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을 설명하면서 쇄국정책이란 말이 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정책을 설명할 단어로 당시의 상황에서 찾는다면 해금정책이란 말이 어울릴 것입니다. 해금이란 바다를 통한 왕래와 교역을 금지한다는 것으로 사실 이것도 주로 중국왕조에서 사용하던 대외정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조선왕조에서도 적용되었는데 중국 상선도 조선에 배를 타고 와서 무역하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서양 배들이 와서 하는 통상요구는 받아들여질 리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2023.03.14 -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오늘의 경사는 곧 국조에서 100년 이래 처음 있는 경사이므로 직접 전궁께 하전을 올렸고 대정에서 축숭을 받았다. 천일이 맑고 화창하여 신인이 서로 기뻐하고 있으니, 이러 때에 견휼하는 정사가 의당 증외의 백성들에게 미쳐야 한다. 제도의 구환과 증렬미 5분의 1, 각공의 지난 것이 남은 것은 1만석까지, 시민의 요역은 1개월까지, 현방속은 30일까지를 탕감함으로써 기쁨을 기억하고 경사를 함께하는 뜻을 보아라.’ 『순조실록』 효명세자가 태어났을 때 순조가 감격하여 한 말입니다. 당시 효명세자는 오랜만에 세자로 책봉된 정실 왕비 소생원자이기도 했습니다. 3세 때 그는 영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일(日)자에 대(大)자를 붙인 글자입니다. 따라서 함경도 관찰사 김이영(金履永)은 세자의 휘와 같다는 이유에서 이름..
2023.03.13 -
홍경래의 난
‘평서 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라. 무릇 관서 지방은 단군 조선의 터전으로 예부터 문물이 융성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는 나라를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쪽 땅을 더러운 흙처럼 버렸다. 심지어 권세 있는 가문의 노비들조차 서쪽 땅 사람들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겠는가?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 권신들의 간악한 짓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김조순의 무리가 국가의 권력을 갖고 노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 번개와 지진이 일어나고 바람과 우박이 없는 해가 없으니, 이 때문에 큰 흉년이 들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셀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 세상을 건질 성인이 나타났으니 그분은 철기 10만의 군대를 거느리셨으며, 부정부패를 척결할..
2023.03.12 -
세도정치의 서막 김조순
정조가 죽음 이후 조선의 정치형태는 세도정치의 모습으로 흘러갔습니다. 정조가 갑자기 사망한 것인데 그의 죽음에는 독살당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따랐습니다. 여기에 따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조선의 왕의 권력이 그리 강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유교를 정치철학으로 삼았고 이러한 유교는 강력한 왕권을 멀리했습니다. 또한 연산군과 광해군이 쫓겨나고 여러 왕들이 독살설이 휘말렸습니다. 따라서 숙종은 조정대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반대파를 누르는 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영조나 정조 역시 탕평책을 편 것도 이러한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왕의 노력에 신하들이나 왕에 대치되는 세력들은 난색을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따라서 정조가 독살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
2023.03.11 -
정조의 신해통공
정조 15년인 1791년 신해통공이 실시됩니다. 신해통공이란 각 시전(市廛)의 국역(國役)은 존속시키면서 도가(都價)상업에 대해 공식적으로 금난전권(禁亂廛權)을 금지시킨 조치입니다. 당시 시전은 지금의 시장이라 할 수 있는데 전통사회의 성읍이나 도시에 있던 상설시장이었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관부가 중심이 되어 수도건설사업에 시전건설 계획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막대한 국비와 노동력을 동원하여 상설점포를 짓고 여기에 상인들을 불러 모아 관부 및 일반 시민들의 경제적 수요를 충당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은 정종시기인 1399년에 처음 시행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정부는 새로 지은 시전 건물을 자신들이 지정한 상인들에게 빌려주고, 그 대가로 공랑세(公廊稅 ..
2023.03.10 -
정조를 노린 암살과 권세가 홍국영
영조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이는 정조입니다. 그는 영조의 손자로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결국 뒤주에 갇혀 죽게 되었습니다. 졸지에 죄인의 아들이 된 정조,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776년, 그의 나이 25세였습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을 때 정조 이산의 나이는 불과 11세였습니다. 이후 그의 불안한 시절은 계속되었습니다. 사도세자를 죽게 했던 정치세력에 둘러싸여 15년간을 동궁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밤에 잘 때도 깊이 자지 못하고 항상 옷을 입고 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즉위하면서 한 말은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습니다. 그에 따라 사도세자의 추숭과 노론토벌을 주장하던 선비들이 있었는데 정조는 오히려 그러한 주장을 한 이들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2023.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