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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시행을 외친 김육
조선시대에 농민들이 부담해야 할 세금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크게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세, 역, 공납으로 공납은 공물이라고 합니다. 전세는 토지세로 아무래도 토지를 가지고 있는 양반들이 내는 세금이었습니다. 역에는 군역과 요역이 있으며 군역은 병역의 의무를 지는 것, 요역은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공물은 그 지역의 특산물을 내는 것으로 시간이 갈수록 이 공물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물에는 제철 채소와 과일 그리고 해삼, 전복, 상어, 문어같은 진귀한 해산물과 담비 가죽과 표범가죽, 그리고 사슴가죽 여기에 종이와 그릇, 휴지같은 가내수공업품까지 포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공물을 바치는 과정이 힘들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나는 특산물을 바쳐야 하는데 나지 않는 경우..
2023.03.02 -
인조는 소현세자를 싫어했나.
조선왕실에서는 몇몇 죽음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소현세자의 죽음일 것입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8년간 인질로 끌려가있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삼전도의 예를 행한 후 소현세자와 그의 동생인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8년간의 인질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지 2달 만인 1648년 4월 사망하였습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며칠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조선왕조실록』 이..
2023.03.01 -
병자호란의 싸움 쌍령전투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다시 한 번 외적의 침략에 의한 난리를 겪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병자호란, 과연 피할 수 없던 전쟁이었나. 사실 생각해보면 그건 쉽지 않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인조반정의 이유에는 바로 광해군가 중립외교를 했다는 것도 포함되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 후금의 전력을 명나라보다 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하고 세계관이 성리학이었고 따라서 조선에게 임진왜란 때 파병해준 명나라 대신 후금과 친하게 지내라는 것은 어쩌면 어려운 부탁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시의 정책은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지극히 현실적이지 못했고 정묘호란을 겪었음에도 국제적인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친명배금정책이라는 현실과 거리가 있는 외교노선을 고집..
2023.02.28 -
임진왜란과는 달랐던 병자호란
1627년 정묘호란을 겪은 조선은 후금의 형제의 관계를 맺기로 하고 평화를 약속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대륙의 지배를 두고 명과 다투던 후금의 세력이 점차 우위에 올라서자 후금의 태도는 달라졌습니다. 후금은 조선에게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고 병선 혹은 병력을 요구하더니 더 나아가 조선과의 관계를 형제관계에서 군신의 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에 후금의 요구가 과하다고 생각한 조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635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향하여 더욱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전쟁을 주장한 신하들 중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보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은 거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후금 아니 청의 침입을 맞..
2023.02.27 -
정묘호란은 어땠나.
광해군에서 인조로 바뀐 인조반정,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광해군의 잘못으로 삼고 일으킨 반정이기에 인조정권은 이전의 외교정책에 비교하여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친명배금정책, 이 정책이 후금을 자극했을까. 1627년 후금이 조선으로 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는 말이 들렸을 때 조선 조정은 후금의 군대가 왜 조선으로 쳐들어왔는지 갸우뚱했다고 합니다.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려고 한 것은 맞지만 조선입장에서는 후금을 자극할만한 군사적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후금의 통치자는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였습니다. 그는 후에 청 태종이 되는 인물로 대외정책에 있어 강경론자였다고 하며 그에 따라 조선정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렇게 조선에 대한 정벌을 벼르고 있던..
2023.02.26 -
이괄의 난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위기가 있었으니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괄의 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괄은 인조가 반정을 일으킬 때 반정군의 임시대장을 맡았습니다. 본래 반정군의 대장은 김류였으나 당시 이들의 반정계획은 알려진 상황이었고 김류가 이에 대해 고심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반정을 일으키기로 한 장소에 약속보다 늦게 나타납니다. 반정군의 대장으로 이괄이 될 뻔했으나 다시 김류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진 인조반정, 이 거사에서 이괄은 나름 중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군대를 일거에 정비하고 반정을 이끌었으니 반정 직후에는 ‘이괄이 병조판서감이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일등공신이 아닌 이등 공신에 책봉되었습니다. 이에 분노를 할..
2023.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