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552)
-
인조반정 광해군의 문제는 무엇이었나.
광해군은 왕이 되었으나 왕으로 기록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조반정으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에게 여러 죄목이 지목되어 물러나게 되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인목대비 폐비 문제였습니다. 그는 왜 그래야 했을까. 현대에 들어서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우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성군을 쫓아냈다라는 평가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에 나라를 위해 뛰어다니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역사서에 기록된 그의 이미지와 반정으로 쫓겨난 것과는 상반되는 측면이 비쳐지기는 하지만 그러한 평가가 인조반정을 성군을 쫓아낸 반란으로까지 평가가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특정정치집단을 선호한 것은 단지 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물론 전제군주가 여러 정치집단을 이해..
2023.02.24 -
광해군은 왜 대동법 시행을 꺼렸나.
때는 1600년대 초반 임진왜란은 끝이 났지만 여전히 그 상처는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경작지는 크게 훼손되었고 이로 인해 농사지을 땅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농지도 부자 양반들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반 농민들은 양반들의 토지를 빌려 경작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은 경작을 하고 나서 지주에게 많은 지대를 받쳐야 했습니다. 여기에 세금도 내야 했으니 농민들의 삶은 나아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임금인 광해군에게 시급한 것은 이러한 농민들을 살리는 일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경작지를 늘려야 했습니다. 당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조선 전체를 합친다 해도 전쟁 전 수준의 전라도 수준 정도인 50여만결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공명첩을 시행하여 돈을 받아 세금을..
2023.02.23 -
사르후 전투 그리고 광해군의 외교정책
광해군은 조선의 제 15대 왕이지만 그의 단어에는 왕이란 말대신 군이 붙습니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 김씨였습니다. 그러면 그에게 형도 있었을 것이고 그는 임해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격이 막장이었으니 그러한 이유로 세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일례로 그는 임진왜란 중에 순화군과 함경도로 떠나 병력을 모아야 했는데 본연의 임무는 제쳐두고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녔습니다. 이에 참다못한 국경인, 국세필 등 함경도 백성들이 일본군의 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하여 임해군과 순화군을 붙잡아 넘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 나름 공이 있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선조는 세자의 자리에 그의 아들 중 유..
2023.02.22 -
징비록
징비록은 류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을 때에 집필한 책으로 제목인 ‘징비’는 『시경』 소비편에 나오는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란 문장에서 따왔습니다. 그리고 문장의 뜻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조심한다.’는 의미로 임진왜란 후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전의 일을 가끔 기록한 것은 그 전란의 발단을 규명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겪었는데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중요한 직책을 맡았지만 전란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기반성이 묻어 있는 책입니다. 이후에 임진왜란과 관련된 책은 더러 있지만 이 책은 당시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의 시선에서 바라봤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1599년 2월 집필을 시작하여 ..
2023.02.21 -
임진왜란 시기의 명재상 류성룡
‘공의 휘는 성룡이고, 자는 이현(而見)이며 성은 류(柳)씨이다. 공의 선조는 풍산현 사람이다. 군수를 지낸 공작의 손자이고, 관찰사를 지낸 중영의 아들이다. 젊었을 때 총명하고 박학하였으니, 도산에서 이 선생(이황)을 처음 뵈었을 때 이 선생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지이다.”하였다.’ 허목, 『기언(記言)』「서애유사」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에 선조 임금을 수행하며 왜군을 물리칠 때 큰 역할을 했던 재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는데 21세 때인 1562년 형인 겸암 류운룡과 함께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갔다가 하늘이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그는 4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고 급제한 뒤 승정원·홍문관·사간원 등 관서를 두루 거치고 이조·..
2023.02.20 -
원균과 칠천량 해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장수 원균은 경상우수사, 삼도수군통제사, 전라좌병사를 지낸 무신으로 경상우수사 시절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방적으로 패주하였다가 이순신의 원병 합세로 연승에 가담하였습니다. 하지만 포상과정에서 이순신과 다툼이 심해 불화가 발생하였으며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직에 임명되자 이에 반발하였고 이듬해 12월에는 충청병사로 전출되었다가 얼마 뒤에는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난폭하고 부하들을 함부로 대한다는 평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 조선, 명, 일본 사이에는 강화교섭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화협상이 틀어진 데에는 일본 측이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협상의 대표자로 나선 것은 명의 심유경, 그리고 일본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나섰습니다. 당시 ..
2023.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