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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계비와 영토분쟁
간도란 곳이 있습니다. 청이 이 지역에 대해 조선인과 청나라인 모두 들어갈 수 없도록 봉금지역으로 정하고 나서 섬과 같은 땅이라는 의미로 간도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잇고 조선사람들이 이 곳에 건너와 황무지를 개간하여 간토라고 하였는데 이후에 간도라고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입니다. 그러던 1880년대 조선과 청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났습니다. 1712년에 국경 답사 후 세웠던 백두산 정계비에 새겨진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란 문구 때문인데 압록이란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압록강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토문입니다. 청나라는 이것에 대해 두만강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조선은 이에 대해 쑹화강 지류로 보는 것입니다. 간도에 대해서 조선은 예로부터 우리들의 영토라 생각했고 청나라는..
2023.01.13 -
정조의 죽음은 독살 때문일까.
"이날 유시(酉時)에 상(정조)이 창경궁(昌慶宮)의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三角山)이 울었다. 앞서 양주(楊州)와 장단(長湍)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이 났다" -정조실록 中 1800년 정조가 병상에 누운지 보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세종 이후 성군이라 불리던 조선의 왕이었고 당시 세계사는 근대화를 물결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군주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던 왕의 죽음은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이 정조의 죽음은 조선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망국의 길로 가는 하나의 예고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죽음에는..
2023.01.12 -
초량왜관은 어떤 곳이었을까.
초량왜관은 조선 전기 부산포 왜관, 임진왜란 직후 설치된 절영도 왜관, 1607년(선조 40) 조성된 두모포 왜관에 이은 네 번째 왜관으로 일본의 외교와 무역이 진행된 곳입니다. 이 곳은 임진왜란 이후 전쟁의 상처로 양국 간에는 국교가 단절되었으나 그렇다고 가까운 두 나라가 마냥 연을 끊고만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설치된 것이 바로 왜관입니다. 이러한 왜관은 조선초기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러한 왜관의 설치는 일방적인 성격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왜관이 있으면 일본에도 조선관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왜관 설치는 왜구출몰에 의한 회유책이었습니다. 당시 왜구의 근거지는 대마도라 여겼으며 이 곳은 경제적으로 자활이 어렵고 무역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
2023.01.11 -
흑산도 해역의 생물학사전 자산어보
1824년에 완성된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 당시 7년간 집필한 해양생물학 사전으로 해양 생물의 형태, 생태, 요리법, 효능 등이 기록된 책입니다. 현대에도 흑산도는 어업의 전진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미 200여 년이 앞선 시대에 이 흑산도 부근의 생태계에 대한 해양총서를 남겼습니다. 그럼 『자산어보』는 어떤 책일까. 조선시대 해양에 관한 책은 1803년(순조 3) 김려(金鑢)가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학서(魚類學書)의 『우해이어보』가 있으며 이 책은 남해안 진해 부근의 어족에 관한 것을 중심으로 연구한 책입니다. 그리고 1820년경 서유구(徐有榘)가 저술한 어류학(魚類學)에 관한 기술서인 『난호어목지』가 있으며 이 책은 서유구가 난호 지방의 어족에 관하여 조사한 책입니다. 그..
2023.01.10 -
조선왕조에 대한 가장 생생한 기록 승정원일기
승정원은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이었습니다. 승정원에 대한 업무에 대해 대체적으로 왕의 비서기관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왕명출납과 더불어 제반 행정 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기록하였으니 그 책은 『승정원일기』라고 합니다. 『승정원』은 유네스코 세계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선정될 만큼 중요한 기록물이며 그 양도 무척 방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건국초기부터 작성된 『승정원』은 임진왜란, 이괄의 난 그리고 각종 화재로 인해 불타 현재는 인조 때붜의 기록부터 남아잇으나 그 양이 288년간 작성되어 3245책 2억2650만자를 남겼습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888책 4770만 자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며 중국이 기록한 (3996만자)와 (1600만자)와는 더 많은 격차를 보입니다. 그리..
2023.01.09 -
화가 신윤복은 왜 금기를 소재로 삼았을까.
신윤복은 조선시대 후기의 풍속화가로 특히 여성들을 주소재로 삼은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의 그림이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문화에 대해 드러내놓는 것에 대해 금기시하고 성리학적인 유교질서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때였지만 신윤복의 그림은 18세기의 모습의 풍속을 가감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신윤복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미인도는 옷고름을 풀려고 하는 조선여성의 전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과 함께 그림에는 적혀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盤礡胸中萬化春 筆端能與物傳神(반박흉중만화춘 필단능여물전신)’ ‘가슴속 깊은 곳에 서려 있는 춘정, 붓끝으로 능히 그 마음 전하도다.’ 이 연인은 가채모양의 머리를 한 것으로 보아 사대부가 아닌 기생으로 보이는데 착 달라붙은 ..
2023.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