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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의 빛나는 승리 봉오동 전투
19세기 후반에 일어서 우리나라는 외국의 침탈에 무방비상태였고 결국 1910년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애국지사들의 독립활동은 국내에서 예전처럼 활발히 할 수 없었던 바 이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렇다고 국내에서 독립에 대한 활동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에 대한 기운을 키우고 자치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는가 한편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장교들을 양성하던 즈음인 1919년에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 전세계에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만주와 연해주에 있던 독립군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국내로 잠입하여 일본군과 경찰서에 타격을 입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일본..
2023.01.19 -
당나라 속의 고구려 제나라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당나라에 의해 많은 고구려인들이 만주의 서쪽에 있는 영주라는 곳으로 강제이주당합니다. 당시 이 곳에 끌려온 고구려인들은 약 20만 명, 그리고 이 곳에서 당나라에 나라를 세우는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정기로 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 년전에 중국 산둥반도에 제나라를 세우고 당나라를 위협했던 고구려인의 후손입니다. 사실 이정기에 대한 출생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강제이주당한 고구려인의 후손일 것이라는 것은 일종의 추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명이 회옥인 그는 732년에 태어났으며 당나라 안에서 안녹산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주에 주둔하고 있던 평로군의 장수로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안녹산의 반란을 막기 위해 당나라 조정..
2023.01.18 -
김춘추는 민족반역자인가, 삼국통일의 주역인가.
642년 고구려의 평양에서 중요한 회담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과 신라에서 건너온 사신 김춘추의 만남이었습니다. 당시 김춘추는 왜 고구려로 사신으로 건너갔을까. 그보다 1년 전인 641년 백제 31대 왕인 의자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침공합니다. 이것은 선대 왕인 성왕이 신라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과 관련 있을 것입니다. 당시 백제는 신라에 대한 침략으로 40여 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침략의 과정에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신라가 빼앗고 이후 성왕의 신라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마당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죽었으니 백제와 신라는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아니 서로 칼을 겨눠야..
2023.01.17 -
김원봉과 의열단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진행하였습니다. 그 중에 무력으로 투쟁을 벌인 단체도 있었으며 그러한 단체에는 의열단이 있었고 의열단을 이끄는 단장은 김원봉이었습니다. 일제는 김원봉에게 독립운동가 중 가장 많은 현상금을 내걸었습니다. 김구가 현금 60만원 (약 200억원)의 현상금을 걸렸는데 김원봉에게는 현금 100만원(약 300억원)을 내건 것입니다. 김원봉은 1898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다가 보통학교에 편입하였습니다. 하지만 1911년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나눠준 일장기를 학교변소에 버렸고 이로 인해 김원봉은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없었습니다. 이후 동화중학에 편입한 김원봉은 학교가 일제에 의해 사라지자 표충사라는 절에 머물며..
2023.01.16 -
계유정난의 설계자 한명회
1453년 10월 10일 밤 조선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수양대군이 자신들의 무사를 데리고 당시 좌의정이던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그의 머리를 쇠몽둥이로 가격해 죽인 것입니다. 그럼 수양대군은 누구인가. 그는 세종의 둘째아들로 그의 형은 문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조카는 당시 조선의 왕인 단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삼촌인 수양대군이 왜 김종서를 죽였을까. 그의 죄목은 바로 역모죄였습니다. 그리고 김종서와 같은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궁으로 불러 죽였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계유정난입니다. 그럼 과연 김종서는 역모죄를 꾸미고 있었을까. 그는 세종 대에 명을 받들어 6진을 개척한 인물로 태종대에 관직에 진출하여 세종, 문종, 단종 때까지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세종은 우리나라 역대 ..
2023.01.15 -
개화파의 균열과 김옥균과 민영익의 갈등
1884년 우정국 설립을 축하하는 자리에 고위관리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개화당이 국왕과 왕후를 창덕궁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경우궁으로 옮기고 군사 지휘권을 가진 수구파 거물 한규직(韓圭稷)·윤태준·이조연(李祖淵) 등과 민씨 수구파 거물인 민태호(閔台鎬)·민영목(閔泳穆) 등을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였으며 개화당이 배신자 유재현도 처단하였습니다. 당시 개화당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김옥균의 개화당이 보낸 자객의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살아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민영익입니다. 갑신정변의 주동자의 김옥균과 그가 이끄는 세력의 칼에 맞은 민영익, 그런데 이들은 한 때 뜻을 같이 하던 동지였습니다. 김옥균과 민영익은 조선 후기에 나라의 ..
2023.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