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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은 왜 이차돈을 희생시켰을까.
법흥왕 시절 그의 가까운 신하로 이차돈이 있었습니다. 법흥왕은 불교를 신봉하여 이를 일으키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현이 어려웠습니다. 이에 이차돈은 왕명을 가장하여 천경림이란 곳에 절을 짓겠다고 합니다. 이에 귀족들이 반발하면 자신에게 죄를 물어 목을 쳐 달라고 합니다. 불교를 흥하게 하더라도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부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이라며 이차돈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왕과의 밀약 하에 천경림에 이차돈은 절을 짓고자 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의 진실에는 이차돈이 법흥왕과 짜고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이차돈이 단독으로 일을 진행하여 절을 지었다고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가 절을 짓고자 하는 천경림이란 곳은 어떤 곳인가. 바로 신라 지배자들의 고유의 신을 ..
2022.11.26 -
국제교류를 위한 승부수 장수왕의 남진정책
장수왕이 고구려의 왕으로 있던 시절, 대륙은 이민족의 화북과 한족(漢族)의 화남을 차지하며 남북조시대를 이루었습니다. 아직 통일이 되지 않았던 만큼 외교전쟁은 더욱 치열했는데 장수왕은 413년에 동진으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고 이에 동진은 장수왕에게 작호를 내립니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동북아의 강대국였던 지라 송나라에서 작호를 내려 안심시켰습니다. 한편 425년에는 북위로부터 화친동맹을 맺어 작호를 받았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북위의 황제에게 북위황제의 한자를 물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왕조에서는 천자와 그 조상들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문서에 쓰는 것을 관례로 하였는데 고구려가 이러한 글자를 알고 싶다는 것은 고구려가 북위를 천자국으로 받들겠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복속의 의미가 아니었습니..
2022.11.25 -
고대 삼한은 철기생산과 유통의 중심
우리나라에 언제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는지는 아직 논쟁거리이지만 대체적으로 두 가지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에 ‘명도전(明刀錢)’과 함께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철기문화가 들어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 한나라의 금속문화가 도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후 철기 사용은 보편화되고 무기와 농기구가 철기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로 만든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높은 온도로 광석을 녹여서 금속을 만드는 가마인 제련로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삼한시대에 이미 제련로를 만들어 철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철기가 발견된 유적지로는 다호리 무덤이 있으며 이 무덤의 축조 시기는 기원전 1세기~ ..
2022.11.24 -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은 어디까지였나.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고구려는 위기였습니다. 모용황이 서기 339년 고구려 서북방의 중요 거점인 신성(新城)을 공격한데 이어 342년에 다시 고구려를 침략해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인질로 잡아가는가 하면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까지 파갔다가 되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고국원왕이 서기 371년 평양까지 치고 올라온 백제군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고구려는 그야말로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은 아버지 고국원왕이 죽은 지 4년 뒤인 서기 375년을 시작으로 376년, 377년 그렇게 해마다 백제를 공격하였는데 다분히 부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어렸을 적부터 보고 자란 태자 담덕은 백제는 정복해야 할 나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2022.11.23 -
고조선의 첫 도읍지는 어디였을까.
일제시대 당시 식민사학을 심으려는 일본의 노력은 심했습니다. 그에 대해 우리민족 사학자들의 분노는 커졌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학자들은 당시 국내의 언론을 인용하여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미족사학자 정인보 선생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조선의 시조 단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기자조선은 없고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의 험독, 지금으로 따지면 요령성으로 추정했습니다. 그리고 삼한(三韓)은 지명이 아니라 한(汗)이나 간(干)처럼 크다거나 임금이라는 뜻의 일종의 존칭이며 고조선과 별개라는 정체세력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수를 지금의 하북성 영평 일대를 흐르는 난하지역으로, 그리고 한사군의 위치를 ..
2022.11.22 -
신석기인들은 왜 대한해협을 건넜을까.
우리는 신석기시대하면 빗살무기토기를 떠올릴 것입니다. 어쩌면 그게 신석기를 기억하는 가장 명쾌한 유물로서 각인되어 신석기시대를 오인하게 만들 수 있는데요. 그 시대를 돌을 갈아 도구로 썼던 그 시대에 대해 원시적인 상황만이 생각되는 것은 지나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선사시대에도 무역을 했습니다. 지금처럼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는 먼 나라와 행해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우리와 가까운 일본과는 교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신석기 시대는 한일 교역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산동삼에는 조개무덤이 있는데 이 곳에서 흑요석제 석기와 작은 흑요석 조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된 흑요석들이 한반도의 것이 아닌 일본 규슈 서남쪽 사가현의 고시다케가 산지로 밝혀졌습니다. ..
2022.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