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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어떻게 망했을까.
기원전 5세기말 중국은 전국 7웅이 자웅을 겨루는 전국시대였습니다. 그 중 연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침략으로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대동강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고조선은 세력을 회복하여 연나라의 동쪽 땅을 빼앗았습니다. 기원전 206년에는 최초의 중국의 통일왕조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한나라가 그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당시 한나라를 위협한 최대의 적은 북쪽의 흉노와 동쪽의 고조선이었습니다. 당시 고조선은 한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남쪽 국가들이 한나라와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개무역으로 이득을 챙겼으며 흉노와 제휴하여 한나라를 견제하려 했습니다. 당시 흉노는 한나라에게 가장 큰 적이었으므로 한나라의 1대 황제 고조는 이를 정벌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묵돌선우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패배하고 이들..
2022.11.14 -
부여건국설화와 고구려건국설화는 왜 닮았을까.
우리는 부여란 나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우리나라 고대국가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며 ‘사출도’라고 하는 정치체제가 특징인 나라로 알고 있는데 왕을 중심으로 마가, 우가, 저가, 구가를 우두머리로 하는 세력들이 모인 연맹왕국이라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 외에도 대사(大使)·사자(使者) 등의 지배층과 하호(下戶)라고 불리던 피지배 계급으로 나뉘어 생활한 국가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건국과정에서 부여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부여라는 단어는 백제의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는 데서 또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부여’란 단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가 고조선이라는 ..
2022.11.13 -
안시성 싸움, 어떻게 싸웠나.
수나라가 패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습니다. 그러면서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잠시 평화시기가 있었습니다. 건국 초기의 당나라는 안정이 필요했고 당을 세운 고조 이연도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 실패를 교훈 삼아 고구려 정벌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 이 두 나라는 여수전쟁간의 생긴 포로를 맞교환하는 평화적인 제스처를 서로 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태종이 즉위하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당태종은 이세민,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자신의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죽이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른바 ‘현무문의 변’, 이렇게 왕조 국가로서는 썩 순조로운 계승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오른 당태종은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황제 중 한 명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정관의 치’라고 하는 업적으로 개인적인 마음을..
2022.11.12 -
나당 전쟁의 승기를 가져오다. 매소성 전투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 야욕을 드러내므로 나당전쟁을 불가피했습니다. 당시 당이 백제왕자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으면서 신라를 견제하자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고 이에 대항합니다. 이에 당고종은 고간 이근행에게 4만의 군사를 주어 평양으로 진군케 하였는데 이를 신라상장군 의복이 현재의 예성강 부근의 백수성에서 당군과 만나 혈전을 벌여 당군 수천을 베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당나라군을 추격한 신라군은 지금의 황해도 서흥으로 추정되는 석문에서 다시 한 번 붙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전쟁의 공을 자신들에게 가져가려는 욕심 때문에 제대로 된 협력과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전열이 흐트러졌고 당군은 이 빈틈을 노려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이 연합된 군대에게 참패를 안..
2022.11.11 -
울진봉평신라비
선조가 남겨놓은 유물은 발굴단에 의해 찾아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연한 기회에 일반인들에 의해 발견되기도 합니다. 울진 봉평 신라비도 그러한데 이 비는 1988년 1월 20일 울진 봉평리에 있는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한 농부는 자신의 논에 박혀 있던 이 비를 농사에 방해하는 것쯤으로 여겨 빼내어 하천에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던 두 달 뒤인 3월 20일 이 지역의 이장이 버려진 이 비를 발견하고는 이 돌을 정원석으로 쓰기 위하여 포클레인으로 마을 옆 빈터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면서 돌에 묻은 흙을 씻어내리게 되었고 그러면서 희미한 글씨가 보였기 때문에 평범한 돌이 아니라고 여긴 이장은 울진 군청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는 신라시대의 비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발견된 ..
2022.11.10 -
고구려 건축기술의 결정체 장안성
고구려는 졸본에 도읍한 국가였으며 이후에 도읍지를 2번에 걸쳐 국내성과 평양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면서 도읍지에는 고구려만의 특징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바로 고구려 도성제로 평지 거주성과 유사시 방어목적으로 사용하는 산성을 같이 축성한 것입니다. 졸본에 도읍하던 시기에는 평지성인 졸본성과 방어기능을 담당하는 오녀산성이 있었고 유리왕 대에는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게 되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같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였을 때도 이를 이어받아 만든 것이 바로 안학궁과 대성산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평양 내에서 586년에 도성을 장안성으로 다시 한 번 옮기게 됩니다. 그러니까 평양성 내에서 한 번의 이동이 있었던 셈이므로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총 3번의 이동을 통해 왕..
2022.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