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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승리 살수대첩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 113만 3천 800여명의 병력을 동원되었습니다. 병력의 길이가 960리, 400km에 달했다고 합니다. 보급운송을 합치면 더 많은 숫자였을 것입니다. 300여 년 만에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가 19세기 이전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큰 규모의 병력을 고구려에 정벌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589년 정월 수나라는 진나라 수도 건강을 함락하고 370여 년간의 대혼란을 마감, 중원을 통일하였습니다. 이 소식은 고구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진나라와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진나라 멸망은 고구려 평원왕에게 전해져 근심으로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전해지나 뒤를 이은 영양왕은 달랐습니다. 그는 말갈을 동원하고 거란을 단속했으며 몰래 돈을 써서 쇠뇌기술자를 꾀어 고구려로 귀..
2022.07.17 -
한강유역을 점령한 신라의 진흥왕 순수비
조선 후기의 문신 추사 김정희는 추사체로 글씨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동시에 그는 금석문학자로 옛 것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에 관심을 가질 줄 아는 선비였습니다. 그는 비문을 해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비를 찾거나 무덤을 추정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정희가 했던 일련의 모습들은 현대의 고고학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아마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첫 번째 고고학자일지도 모릅니다. 김정희는 친구 김경연과 1816년 북한산에 올라왔습니다. 그들이 올라간 비봉에는 이끼가 잔뜩 낀 비석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이 비봉이란 이름도 비석이 하나 있어서 그렇게 이름지어진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 비봉의 비석에 대해 신라시대의 도선국사가 후에 무학대사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위해 이곳에 올라올 것이라는 ..
2022.07.16 -
단양적성비, 신라를 알려주다.
1978년 1월 국내 한 대학교 학술조사단은 온달의 유적을 찾기 위해 충북 단양을 탐사하였습니다. 이들은 단양에 있는 성재산에 들렀지만 밤새 내린 눈으로 힘들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돌에 발을 올리고 신발을 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돌덩이에 글자가 써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들 눈에 띈 것은 대(大)였으며 이어 아(阿)자와 간(刊)자도 보였습니다. 이들은 발굴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찾아낸 이 땅의 선조가 남긴 것, 단양 신라 적성비를 발견한 순간이었습니다. 단양 적성비는 성재산 정상부의 323미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높이 93cm, 폭 107cm, 두께 25cm의 크기인 적성비는 그 형태가 두꺼웠는데 위가 넓고 두꺼웠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좁아지고 얇아진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윗부분은 잘려..
2022.07.15 -
천마도의 비밀
1970년대 한 무덤의 발굴이 있었습니다. 경주 155호 고분이었는데요.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적석목곽분인 이 무덤에서는 만 여 점이 넘는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된 것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무껍질에 그려진 말의 그림이었습니다. 특히 이 그림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신라의 회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인데다 그 수준도 높았기 때문입니다. 1500여 년 동안 묻혀 있었으니 발굴 당시 모습은 안좋을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발굴에 엄청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젖은 솜과 화선지로 덮어 서울로 이송된 그림 바로 천마도였습니다. 이 천마도는 가장 자리가 벌어져 나무껍질이 보이는데요. 그 재질은 바로 백화수피, 자작나무 껄..
2022.07.14 -
금동 연가 7년명 여래입상이 알려주는 사실
수많은 문화재들이 박물관에 전시됩니다. 그리고 이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합니다. 하지만 문화재를 지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에 있는 문화재들이 도난당하는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문화재 관리국장께 직접 알리시오. 오늘밤 12시까지 돌려준다고, 세계 신기록을 남기기 위해 1시에 전화하겠소." 67년 10월 24일 오전 10시 반 서울 덕수궁 미술관 2층 전시실을 순찰을 돌던 경비원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유리진열장 속에 있어야 할 고구려불상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위와 같은 내용이 적힌 메모만 남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문화재관리국과 경찰이 발칵 뒤집힌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범인은 오전 11시 반, 오후 3시, 6시에 관리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돌려주겠다."는 ..
2022.07.13 -
신라 정권 유지 장치 근친혼
조선 말기 노량나루에는 큰돌이라는 노처녀가 문안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새신부가 첫날밤에 웃저고리를 벗기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를 미심쩍게 여긴 신랑이 곤히 잠든 큰돌이의 저고를 벗겼는데 팔뚝에 자기가 모르는 사내의 이름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른바 연비라는 풍속입니다. 이 풍속은 우리 조상들이 행한 것으로 고려에서 조선말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우정분을 나눈 연인끼리 서로의 이름을 팔뚝이나 허벅지에 새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친정에 알려지자 큰돌이를 친정에서 업어와 물을 적신 종이를 얼굴에 붙인 후 질식사시키고 강물에 버려졌습니다. 사실 이러한 데에는 연비라는 풍속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팔에 새겨진 사나이의 실체 때문입니다. 바로 같은 마을에 사는 동성동본..
2022.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