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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요서에 진출했을까.
우리가 역사시간에 백제의 전성기를 접하고 나면 백제가 해외진출을 하였다면서 요서로 화살표가 표시된 지도를 접하게 됩니다. 과연 이러한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일까요. “근구수왕이 바다를 건너 중국 대륙을 경략하여, 선비족 모용씨의 연나라와 부씨의 진나라를 정벌, 오늘날의 요서, 산동, 강소, 잘강 등지를 경략하여 광대한 토지를 장만하였다.” 『조선상고사』-신채호- “문헌통고에 의하면 ‘당시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진평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고 한다.”『동국문헌비고』 “당시 백제가 점령한 곳은 당나라 때의 유성과 북평 사이의 지역이었다.””『문헌통고』(1391년 중국 송나라 때 편찬된 백과전서) 일제 강점기 시대의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물론 중국의 문헌에서..
2022.06.23 -
백제에서 건너온 일본유학의 아버지 왕인
"백제 왕이 (일본에) 아직기를 보내 좋은 말 2필을 바치니 아직기에게 말을 돌보게 하였다. 그런데 아직기가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왕이 아직기에게 '그대보다 더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하고 물으니 아직기는 '왕인이 뛰어납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곧바로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을 초빙했다. 왕인은 태자의 스승이 되어 여러 경전들을 가르쳤는데 태자가 배우는 데 막힘이 없었다. 왕인은 서수의 시조이다." 이 이야기는 일본의 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책 『일본 서기』에 실린 백제 박사 왕인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왕인은 일본으로 건너가 태자의 스승으로 학문을 가르치고 천자문과 논어를 전할 만큼 학식이 뛰어난 사람으로 그의 이름 뒤에 붙는 박사란 칭호는 백제에서는 어느 한 분야에서 독보적..
2022.06.22 -
김알지는 흉노족과 관계가 있을까.
1796년 낭산 선덕여왕릉 아래에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사롭지 않은 비석 하단부와 우측 상단부 조각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문무왕비석이었습니다. 이후 사라진 비석은 1961년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2009년에도 일부 발견되었는데 당시에는 가정집의 빨래판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는 다른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우리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런 근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 내려온다. 화관지후 (和關之后)이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바야흐로 융성했다. 밑둥과 가지의 이어짐이 비로소 생겨 영이한 투후(秺侯)는 제천(祭天)할 아들로 태어났다. 7대를 전하니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 이 글에서는 성한왕이 등장하고 그의 7대..
2022.06.21 -
투박하지만 생생한 역사재현 신라 토우
여러분, 토우라고 아시나요, 흙으로 만든 조그만 인형 혹은 항아리 목둘레에 붙은 장식품을 토우라고 합니다. 덴마크의 한 전시관에서는 신라의 토우와 덴마크의 레고가 어우러져 전시되기도 하였습니다. 레고는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장난감이지만 토우는 그 의미가 약간 다릅니다. 토우는 죽은 자를 매장할 때 묻는 물건, 즉 부장품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토우는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기도 하는데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남자의 성기나 여자의 유방, 엉덩이가 과장되어 표현되었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바로 신라 시대 때 만들어진 토우입니다. 신라 때 만들어진 토우를 살펴보면 동물, 인물, 생활용구 등을 ..
2022.06.20 -
임나일본부설을 뒤집는 가야의 철기 유물
임나일본부설이라고 아시나요. 이것은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로 우리나라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더러 믿는 학자들이 있는 학설입니다. 이 학설은 약 150여년 전 메이지 정부가 외친 ‘조선은 우리의 부속국이다.’를 뒷받침하는 학설로 당시 일본참모본부는 비밀리에 작전용 지도를 작성하는 동시에 광개토대왕비문의 해석 등 자료수집에 열을 올리며 고대사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임나일본부설은 일선동조론의 핵심이론이 되어 청일전쟁 이후에는 우리나라에 대한 현지조사를 진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기록하지 않은 『삼국사기』를 위서로 규정하고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김해를 샅..
2022.06.19 -
낙랑공주는 왜 자명고를 찢어야 했을까.
한국 고대사의 비극적인 남녀사랑이야기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아들로 대무신왕은 그를 무척 사랑하여 호동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대무신왕 15년에 호동왕자는 옥저(沃沮)를 유람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낙랑의 왕 최리를 만나게 됩니다. 낙랑의 왕 최리는 호동왕자에게 비범함을 느꼈는지 아니면 고구려와 동맹을 의식해서였는지 그를 데리고 가서 사위로 삼습니다. 그리고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낙랑국에 두고 혼자 고구려로 돌아옵니다. 그런 호동왕자는 낙랑국에 있는 자신의 아내 최씨녀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런 말을 전합니다. "그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나팔을 몰래 찢어버린다면 내가 그대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2022.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