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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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 김처선
TV 드라마나 사극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김처선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극에서는 아예 그를 '왕의 남자'라는 타이틀로 주인공처럼 다루었고 각종 사극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김처선은 평생을 왕실에 충성했으나 결국 그 충성심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1504년 4월1일. 그 날 궁궐로 떠나면서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지 부인과 양아들에게 충성심과 효에 대해 특별한 당부를 했습니다. 양아들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내시의 신체적 구조 때문에 아들을 입양해서 길렀던 것입니다. 그날 연산군은 처용무 춤판을 벌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음란했습니다. 원래 처용무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온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인데 연산군은 이것을 자기 취향에 맞게 아주 음란한 것으로 만들었고 하루도 빠짐없이 이런 ..
2024.03.13 -
홍의 장군 곽재우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장군이라 일컫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리어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가 없었다. 충의롭고 곧으며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진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다.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이미 의령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고 군사를 정진강 오른쪽에 주둔시키니 하도(下道)가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의로운 소문이 크게 드러났다.’ 『선조수정일보』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많은 활약을 하였습니다. 그 중 노비들을 데리고 나라를 구하러 의병을 일으킨 이가 바로 곽재우였습니다. 그는 1552년 8월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그가 의병장으로 활동한 곳이기도 하며 이러한 사례로 볼..
2024.03.06 -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힌 여걸 정희왕후
정희왕후는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판중추부사 증영의정 윤번(尹璠)의 딸로 1418년(태종 18) 홍주군아(郡衙)에서 태어났습니다. 윤번은 명문가의 후예였지만 비교적 한직이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정희왕후는 당찬 아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날 윤번의 집에 궁궐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수양대군의 혼처 자리를 알아보러 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정희왕후를 점찍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희왕후의 언니가 후보였습니다. 정희왕후는 아직 나이가 어렸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불쑥 끼어들자 부인이 나무랐습니다. 아직 네 차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감찰각시는 이 아이를 눈여겨 보았습니다. 기상이 범상치 않으니 다시 보기를 청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언니 대신 정희왕후를 선택하니 당시 나이 열한 살이..
2024.03.03 -
조선의 천재 시인 허난설헌
허난설헌은 조선의 시인이자 문장가로 본명은 허초희(許楚姬)이며, 허옥혜(許玉惠)로도 전하며 호는 난설헌이라고 합니다. 허난설헌은 어린 시절부터 아명을 초희라고 지을 정도로 재주가 비상하고 문장가의 소질을 지녔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딸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던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하던 조선시대. 허난설헌의 아버지와 가족들은 그녀가 꾸준히 글을 배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허난설헌은 집안은 꽤나 개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오빠 허봉은 동생 허난설헌에게 시를 가르쳤는데, 그녀가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평가받는 것은 훌륭한 오빠의 지원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난설헌의 아버지는 초당 허엽으로 홍문관 부제학,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며 동인과 서인의 당쟁에서 동인의 영수가 된 사대부의 지도급 ..
2024.02.29 -
음악가 세종대왕
세종대왕은 음악을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중시하였으며 예(禮)와 악(樂)은 왕도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은 ‘종묘제례에서 선왕의 공덕을 찬미하고, 제례악을 연주하면 조상이 감격하고, 조정에서 임금과 신하 사이의 사이가 존경을 하게 되어 이를 방방곡곡에 널리 퍼뜨리면 백성 교화가 실현되고 풍속이 아름답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세종대왕이 음악을 중요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불완전한 향악을 정리하고 아악을 바르게 고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용한 신하가 바로 박연이었습니다. 세종은 측근 신하들이 박연에 대해 비난을 많이 하였으나 이런 의견을 물리치고 수십 년간 곁에 두고 음악 사업을 주도하게 했습니다. 1425(세종7)년에는 경기도 남양에서 ‘소리..
2024.02.23 -
신숙주의 선택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경력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입니다. 그러나 ‘숙주 나물’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는 절개를 저버리고 영달을 선택한 변절자의 한 표상으로 지목되어 상대적으로 폄하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공조참판을 지낸 신장으로 그는 집현전 학사 정인지(鄭麟趾), 윤회(尹淮·1380~1436년) 등과 가까웠으므로 신숙주는 자연스레 윤회에게 공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신숙주가 1439년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처음 맡은 보직이 전농직장(典農直長)이었는데 이조(吏曹)의 담당 관리가 깜빡하고 그에게 오늘날의 공무원증에 해당하는 첩(牒)을 주지 않았습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그 관리를 탄핵해 파직시켰는데 신숙주는 스스로 이..
2024.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