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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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으로 간 조선인 조완벽
역사상에서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꽤나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수도에서 우리 조상들은 베트남 사신들을 마주칠 때면 양국 사신 모두 한자에 능숙하고 한시(漢詩) 등 중국 문화에 통달했던 만큼 말 한마디 통하지 않고도 꽤 깊은 교류를 나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뒤, 이수광은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일본 배의 선원이 돼 베트남을 방문했다는 조완벽이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놀랍게도 베트남에서의 이수광 자신이 유명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조완벽이 일본 상선을 타고 베트남에 갔는데 베트남 관리가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당신도 조선 사람이니 이수광을 알겠지?하고 묻더랍니다. 그런데 조완벽은 어렸을 때 일본의 포로가 돼서 이수광을 모른다고 하니 베트남 사람들 전부가 말이..
2024.02.03 -
농업 발전에 힘쓴 군주 세종
세종 즉위 3년에 조선은 극심한 가뭄으로 굶어 죽는 백성들이 허다했습니다. 세종은 급기야 신하들에게 경회루 옆에 낡은 재목으로 초가집을 지으라 명령합니다. 세종은 처소인 강녕전을 놔두고, 그곳에서 정무를 살피기 시작합니다. 세종은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 만류하는 신하와 소헌왕후의 눈물 어린 호소도 뿌리친 채 "백성들이 굶어서 죽어 나가는데 임금이 어찌 구들장을 지고 편한 잠을 잘 수가 있느냐"라며 단칼에 거절합니다. 그런 생활은 무려 2년 4개월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종의 모습은 어려운 시기에 백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의지를 몸소 보인 것으로 정책이나 업적에서도 백성을 생각했던 세종대왕의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세종은 독자적으로 역법을 계산하고 달력을 만든 것입니다. ..
2024.01.16 -
다물사리 소송사건
1596년 3월 13일 전라도 나주 관아에서 희한한 노비소송이 벌어졌습니다. 원고 이지도는 일흔이 넘은 여인 다물사리가 양인이라고 주장하고, 피고 다물사리는 스스로 노비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자신은 양인이라 주장하고 상대방이 노비라 주장하는 재판이었을 것 같지만 여기서 벌어진 재판은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법에 따라 판결해달라는 시송(始訟)다짐 뒤 삷등(白等)을 했습니다. 삷등은 최초 진술을 뜻하는 옛말로 한자는 이두식으로 음차한 것입니다. 이지도는 다물사리 남편이 자신의 아버지 소유 노비인 윤필의 아들이라는 점을 들어 그 자손들도 자기 집안의 (사)노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선의 양천제(良賤制)에 따라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손도 노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물사..
2023.11.03 -
조선전기 외교관 이예
조선시대 초기 이예는 학성 이씨의 시조이자 조선 전기의 외교관이고 일본을 가장 많이 왕래한 통신사입니다. 통신사 사행에는 많은 수행원이 따르는데, 보통 통신사라 하면 정사·부사·서장관의 삼사(三使)를 말합니다. 조선을 통틀어 통신사는 모두 24회 파견되었는데, 그 삼사 중 이름이 알려진 이는 61명입니다. 이예가 4회, 윤인보가 3회 파견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각 1회 파견되었습니다. 이예는 일본 국왕을 알현한 4회 이외에도 이런저런 일로 유구국, 쓰시마, 규슈 등 일본 각지에 파견되었습니다. 이예가 8세 되던 해(1380년·고려 우왕 6년)에 어머니가 왜구들에 의해 일본으로 잡혀갔습니다. 28세가 된 1400년, 그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가서 쓰시마와 이키시마(壹岐島)의 집집마다 ..
2023.10.27 -
조선시대 신분증 호패
‘호구에 관한 법령이 있기는 하나 누락된 숨은 인부가 열에 여덟, 아홉은 된다.’『세종실록』 호패(號牌)는 조선시대의 신분증입니다. 16세 이상 남성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나라에서 발급한 호패를 착용해야 했습니다. 그 중요성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호패를 차지 않거나 잃어버린 자에게는 태형 50대를 때리고, 빌려서 주고받은 자들은 장형 80대를 때리게 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죄지은 자가 거짓으로 차고 다닐 경우 사형에 처했습니다. 호패법은 조선 태종 대에 실시된 것으로 이해되지만 고려 공양왕 대에 시행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호패법은 원나라의 제도를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수군과 육군의 군정(軍丁)을 장부에 기입하고 호패를 착용하도록 하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태종은 재위 초부터 신료들..
2023.07.06 -
조선시대 편경을 소중히 여긴 이유는
조선 초기 종묘제례악은 중국음악을 가져다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이 음악을 새롭게 바꾸는데요. 그리고 그 중심에는 편경이 있었습니다. 편경을 만들기 위해서 본을 뜨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돌 위에 본이 떠진대로 쇠줄을 갈아가며 돌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 다음은 편경을 나무틀에 걸 수 있도록 구멍을 내야 하는데 이 과정도 사람의 힘으로 쉼 없이 해야 완성됩니다. 편경의 표면을 다듬고 두께를 조절하기 위해 다듬고 문질러야 합니다. 편경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높이를 맞춰나가는 것입니다. 각 율관을 불어가며 정확하게 그 음을 낼 수 있도록 편경의 크기를 끊임없이 조절해 나갑니다. 경석이라는 기이한 재료로 세심한 손길을 통해 만들어지는 편경은 조선시대에 국보급 대우를 받는 악기였습니다. 이 같은 편경..
2023.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