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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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의 유모 봉보 부인
조선의 왕실에서는 왕자나 왕녀에게 젖을 먹이는 유모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유모를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 하였는데 왕자에게 젖을 먹을 당시에는 그냥 ‘유모’로 불리다가 왕자가 왕이 되면 봉보부인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이러한 봉보부인이 시작된 것은 바로 중국의 한나라에서였습니다. 물론 서양에서도 이러한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것은 신분 과시용으로 유모제도가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송나라에서는 진종(眞宗)의 유모 유씨(劉氏)를 진국연수보성부인(秦國延壽保聖夫人)에 봉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진성여왕 때 유모 부호부인이 기록되었으며 고려 우왕이 유모 장씨를 국대부인에 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봉보부인이라는 칭호가 만들어진 것은 조선시대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유모를 ..
2023.04.27 -
홍길동은 오키나와로 건너갔을까.
류큐는 지금은 일본 영토지만 4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독립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아무 관련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 섬에 조선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흔적에서 『홍길동전』의 주인공인 홍길동의 모델을 추정해봅니다. 역사학자 가데나 쇼도쿠는 청년시절 도서관 사서였습니다.그는 오키나와의 역사를 체계화시킨 인물로 1973년에 오키나와 현립 도서관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도서관사서로 있을 때 어떤 질문에 모른다고 했을 때 도서관 직원이 그것도 모르느냐는 핀잔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그는 50이 넘은 나이에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가 만든 역사지도에는 조선사신이 묵은 조선관, 제주마을, 조선인 묘지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2023.04.07 -
징비록
징비록은 류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을 때에 집필한 책으로 제목인 ‘징비’는 『시경』 소비편에 나오는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란 문장에서 따왔습니다. 그리고 문장의 뜻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조심한다.’는 의미로 임진왜란 후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전의 일을 가끔 기록한 것은 그 전란의 발단을 규명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겪었는데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중요한 직책을 맡았지만 전란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기반성이 묻어 있는 책입니다. 이후에 임진왜란과 관련된 책은 더러 있지만 이 책은 당시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의 시선에서 바라봤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1599년 2월 집필을 시작하여 ..
2023.02.21 -
임진왜란 시기의 명재상 류성룡
‘공의 휘는 성룡이고, 자는 이현(而見)이며 성은 류(柳)씨이다. 공의 선조는 풍산현 사람이다. 군수를 지낸 공작의 손자이고, 관찰사를 지낸 중영의 아들이다. 젊었을 때 총명하고 박학하였으니, 도산에서 이 선생(이황)을 처음 뵈었을 때 이 선생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지이다.”하였다.’ 허목, 『기언(記言)』「서애유사」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에 선조 임금을 수행하며 왜군을 물리칠 때 큰 역할을 했던 재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는데 21세 때인 1562년 형인 겸암 류운룡과 함께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갔다가 하늘이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그는 4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고 급제한 뒤 승정원·홍문관·사간원 등 관서를 두루 거치고 이조·..
2023.02.20 -
원균과 칠천량 해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장수 원균은 경상우수사, 삼도수군통제사, 전라좌병사를 지낸 무신으로 경상우수사 시절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방적으로 패주하였다가 이순신의 원병 합세로 연승에 가담하였습니다. 하지만 포상과정에서 이순신과 다툼이 심해 불화가 발생하였으며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직에 임명되자 이에 반발하였고 이듬해 12월에는 충청병사로 전출되었다가 얼마 뒤에는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난폭하고 부하들을 함부로 대한다는 평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 조선, 명, 일본 사이에는 강화교섭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화협상이 틀어진 데에는 일본 측이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협상의 대표자로 나선 것은 명의 심유경, 그리고 일본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나섰습니다. 당시 ..
2023.02.19 -
임진왜란 조선의 반격 그리고 의병의 활약
임진왜란 초기에는 왜군의 의도대로 흘러갔습니다. 그러던 1592년 6월 13일 조선수군은 판옥선 24척과 함선 15척을 가지고 여수를 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6월 18일에는 원균이 합류하였습니다. 당시 정찰대는 거제 옥포에서 왜선을 발견하고 신기전을 쏘아 이를 알렸습니다. 당시 옥포에는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왜선 50여 척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 곳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이를 지켜보고만 있더 조선 수군, 왜적이 모두 배에 승선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왜선이 가까이 다가오자 조선의 수군은 왜군의 100m의 조총 사거리 밖에서 함포사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정거리를 좁히려 했지만 이순신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수군에 왜선 26척이 불타 수몰되..
2023.02.18